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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감상문

오정희 '불의강', 욕망에 대한 위태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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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오정희. 내가 오정희를 알게 된건 13개월 전이다. 비교적 늦게 알게 되었는데 그녀의 문학세계를 접한 후로는 신기할 정도로 끌림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이다. 몇 권을 더 구입해 놓았지만 조금 천천히 읽고 싶다. 생존을 위해 음식을 비축해두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평범하게 놓아둔 보물지도처럼  그녀의 책들이 책꽂이에서 대기중이다. 난 그 여유를 초조하게 즐길 것이다.





불의 강(江) ········· 1977년 5월 문학사상
미명(未明)
·········· 1977년 봄 문학과지성
안개의 둑
············ 1976년 10월 뿌리깊은 나무
적요
······················· 1976년 2월, 1976년 여름 문학사상
목련초(木蓮抄)
······ 1975년 5월 문학사상
봄날
························ 1973년 6월 문학사상
관계
························ 1973년 3월 현대문학
번제(燔祭)
············ 1971년 9월 월간문학
직녀 ························· 1970년 10월 월간문학
산조(散調) ············· 1970년 6월 월간중앙
주자(走者) ············· 1969년 9월 월간문학
완구점 여인
··········· 1968년 1월 1일 중앙일보



■ 12편의 섬뜩한 이야기 ┃ 소설 '불의 강'은 1960년대~1970년대 사이에 발표했던 작품 모음집이다. 지금이 2014년이니까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시기에 쓰여진 소설이다. 나는 오정희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당시에는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가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낮은 그림자처럼 숨어있는 은밀한 속내를 권력자들이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녀의 소설이 꽤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조차 '금기'까지는 아니라도 꽤 조심스럽게 언급할 만한 소재가 등장한다. 다만, 무엇이 파격적인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한 입 베어 문 과일을 건네기 보다는 멀쩡한 과일에서 터져나오는 시큼한 과즙을 맛보게 하리라.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책을 접하는 것이 새롭게 합류할 그녀의 팬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욕망의 섬뜩함'이다. 이 책이 호러소설은 아닐진데 그보다 더 날카롭고 예민하며 위태롭다. 이것이 내가 그녀의 작품에 끌리는 결정적인 이유다. 사실 내 기준에서 봤을 때 그녀의 소설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다. 대중소설이 갖고 있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문체와 표현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소설이 '관념소설'로 보이는 착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흥미진진하지는 않으나 기괴한 긴장감을 주며,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소설 같은 느낌까지 뿜어낸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그녀의 글이 섬뜩함을 주는 이유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해설자 김현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붉은색에 대한 집착은 거의 병적이라고 평했다. 그녀의 글에는 '붉다'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며, '붉다'에서 전해지는 심리적 마침표는 '죽음'과 쉽게 결부되기 때문이다. 박혜경의 해설도 김현과 비슷한 맥락에서 오정희의 글에 섬뜩하게 깃들어 있는 후회, 낯설음, 혼란 등을 설명한다.


오정희의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의 메타포들로 둘러싸인 세계이다. 그 죽음의 메타포들은 생산성이 거세된 불모의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론적 정체성의 상실감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내면 풍경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박혜경 해설 중에서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다. 그렇다면 오정희의 글은 '죽음'에 집착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무엇때문에? 12가지 단편소설 중 대다수가 가족관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좌절, 두려움, 연민, 후회, 욕망 같은 일상적 감정의 끄트머리에 '죽음'을 대롱대롱 붙잡어 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 살갗 밑을 흐르는 혈액 속에는 표면장력이 있어 그는 늘 그렇게 자신의 표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염원으로 잔뜩 웅크린채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미안합니다, 아주 죄송스럽군요, 하는 듯한 웃음을 언제든 필요할 때 즉시 내보낼 수 있도록 입 안쪽 어디쯤에 고여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불의 강' 중에서


노파는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하도 천천히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어서 차라리 해체되어가고 있는 중의 합일이 다시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 '미명' 중에서


그리곤 무력하고 무겁게 늘어진 배에 불을 갖다 대었다. 갑자기 불꽃이 길게 오르고 날개를 통해, 쥐고 있는 손에 약한 떨림이 전해졌다. 한 알의 분가루도 흩트리지 않고 나방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 '안개의 둑' 중에서


내 속에는 어머니를 버리고 달아나던 날 밤의 자욱한 어둠이 급류가 되어 밀려들어오고 그 너머 어디선가에 흰 목련들이 소리를 내며 터지고 있었다. 나를 이윽고 더 깊은 어움 속으로 함몰시키고야 말 꽃들이...(중략)...무언가 저질러버리고 싶다는, 풀무처럼 단내를 풍기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온갖 타락에 대한 열망, 죄악에 대한 열망에 시달릴 때마다 어머니의 뼈에서 피어나던 목련은 어둡고 민감하게 스멀대며 살아나곤 하였다.

- '목련초' 중에서



김기덕 감독의 '시간'이라는 영화가 있다. 과거에 나는 그 영화를 감상하고 '인간의 본질'과 '욕망의 본질'에 대해 아주 짧은 리뷰를 끄적였었다. [리뷰보기]

시간은 매 순간 움직이지만, 결국 매 순간 같은 자리에 맴 돌고 있는 것. 그것은 인간의 한계와 너무도 닮아 있었고, 서로를 사랑한다는 남자와 여자의 욕망이 각기 다른 착지점을 향해 위험천만하게 흔들리는 공간일 뿐이었다. 영화는 끔찍했고 소름끼쳤으며, 오정희 소설과 너무도 닮아 있다.


다시 물어보자. 오정희 소설들에는 왜 '죽음의 메타포'가 넘쳐나는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소유한 시간의 한계성과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라는 노골적이고 명징한 이중성이 있으므로해서 오히려 '삶의 가치'를 되묻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소설가 오정희는 누구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일 것이다. 언제나 삶의 끝을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100년도 못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부류들과는 분명 다르게 살아갈 것이다.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솜털 하나까지 훑어보고, 새벽녘 바다같은 욕망의 심연을 끝까지 직시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경험의 이야기들이 '불의 강'에 가득하다. 남편을 향해, 아내를 향해, 이름 모를 사내를 향해, 도우미 여자를 향해, 며느리를 향해, 남편 친구를 향해, 죽어버린 어머니를 향해, 빨간 오뚝이 인형을 파는 휠체어 타는 완구점 여인을 향해 섬뜩하게 뻗은 호기심과 관능적인 몸부림의 이야기말이다.


박혜경의 평가처럼 오정희의 소설에서는 '황폐하고 매혹적인 요기의 빛'이 난다. 그것이 '섬뜩함'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오정희만의 무서우리만치 투명한 관조적 시선이다. 그 앞에 서있는 독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발가벗겨진듯한 불쾌감을 느낄 것이며,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에 섬뜩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아주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녀가 마지막 피를 토할 때까지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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