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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감상문

정유정의 <28>, 줄거리만 있고 내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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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한 괴질이 화양이라는 소도시에 번졌다. 초기증상으로 눈이 괴물처럼 빨개지는 이 병의 전염률과 치사율은 빠르게 올라갔고 도시는 초토화된다. 그 안에서 사연있는 5명과 한마리의 늑대개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시작된다. 그러나 극적인 스토리를 너무 의식했던 걸까.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어디엔가 숨어버렸다. 해설을 읽었지만 아직도 나는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책 속에 '희망'은 없었는지 모른다. 저자의 바람속에만 존재했을 뿐.

 

 

 

 



 정유정 벌써 초심을 잃었나

 

 

정유정이라는 이름만으로 선택한 소설이었다. <7년의밤> 이후 2년 넘게 기다렸는데, 기대감은 눈사람처럼 녹아버렸다. <7년의밤>에서 보여줬던 묵직한 이야기의 힘은 파쇄되고 없었다. <7년의밤>에서 보여줬던 펄떡거리던 감정선도 없었다. <7년의밤>에서 보여줬던 인물들의 절망과 욕망 사이에서 아지랑이 처럼 피어나는 그 무엇도 없었다. 소설 <28>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28>에는 중심이 되는 서사가 없다.



인물들의 사연은 각자의 섬에서 갇혀 있다. 물론 그들은 서로에게  감정을 부여하거나 부여받았고, 공격하기 위해서든 방어하기 위해서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다.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개연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만든 것은 스토리였고, 그들은 결국 스토리라는 무덤에 묻혔다.





이 소설이 탄생한 배경은 이렇다. 2010년 겨울에 발생한 구제역. MB정권의 무능함과 늦장 대응으로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됐다. 살처분도 법으로 제시된 절차에 따라 고통을 최소화해서 진행돼야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생매장'이라는 방법을 들고 일어섰다. 가축들은 어미든 새끼든 가리지 않고 흙 구덩이로 던져졌고, 흙으로 덮여지기도 전에 서로에게 압사되고 있었다. 구덩이 속에서 두려움과 고통에 울부짖는 가축들의 모습은 큰 충격을 던졌다. 작가 정유정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결국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필을 시작한다. 그래서 바이러스라는 소재로 <28>이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생매장 트라우마가 정유정을 덮친 것 같다. 저자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지만, '희망'은 구덩이 속에서 숨어버렸고, 나는 평론가들의 해설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도시 속에서도 소방서 일을 꿋꿋하게 해내는 기준과 수의사 재형. 세상에 진실을 알리려고 동분서주하는 기자 윤주. 인간에 대한 복수심만 키워가는 동해. 가족이 자신의 전부였던 수진. 그리고 인간에게 사랑과 버림을 동시에 받은 몇 마리 개들.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만 나는 그들의 서글픈 사연만 주구장창 들어야 했다.


<28>은 사연과 감정이 분리된 소설이다. 비유해서 설명을 해보겠다. 한동안 직장을 못구해서 하루 세끼 챙겨먹는 것도 부담스러운 철수가 있었다. 어느날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일뻔한 소녀를 몸을 던져서 구한다. 철수는 어깨뼈가 부러지고, 소녀는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뒤늦게 달려온 소녀의 아버지는 치료비는 물론이고 자신의 회사에 철수를 입사시킨다. 이제 정유정은 말한다. 어떤 감동이나 깨달음을 느껴보라고. 소설 속에는 많은 장치가 존재했지만, 사연과 감정이 분리된 탓에 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이건 결코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소설을 읽는 사람의 심리적 변화는 사건의 크기와 비례해서 요동치지 않는다. 정유정은 <28>속에 실제 있었던 사건을 차입해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시도는 좋았으나 어떤 교훈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일까. 책 속에서 인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나 나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들어갈 수 없었다.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꾸려가지 못하고, 작가가 지나치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자로 잰 듯한 구성은 오히려 스토리의 탄력성을 떨어뜨렸고,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무엇을 책속에서 보고 싶었는지 작가 스스로 정리가 끝나지 못한 상태에서 소설은 완결된 듯 하다.


나는 <28>이 <7년의밤> 판매부수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는 냉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28>이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작가에게도 분명 무언가를 남겼으리라 하는 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작가가 알아챘으면 좋겠다. 앞으로 읽어도 정유정, 뒤에서 읽어도 정유정은 오뚜기처럼 재기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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