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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감상문

고래, 소설의 규칙과 한계를 비웃는 희대의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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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는 미치도록 재밌다. 킹왕짱이다. 그 이상의 분석과 해석은 평론가들에게만 필요할 뿐이다. 더구나 국가적으로 '개인적 일탈'이 많은 요즘에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고래'는 기존 소설들이 갖은 통념을 확실하게 뭉게버리는 일탈을 보여준다. 천명관이 한국 작가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스포일러 없음)



★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책 제목이 왜 '고래'일까?


인간은 거대함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인간은 온갖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것에 감탄하며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타인으로 부터 경외심을 받으며 신분상승을 꿈꾼다. 우리가 경쟁적으로 올리는 초고층 빌딩이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통제받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서 권력과 부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문제는 평등한 인간의 본질마저 야금야금 먹힌다는 것인데, 우린 그 달콤한 유혹을 제대로 밀어내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왜곡된 인간의 본질은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고, 채울 수록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간은 끝없이 거대함을 동경한다. 오죽하면 성경에서도 '바벨탑'으로 등장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불렀을까. 사실 인간에게 거대함이란 교육되어진 욕망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몸집 좋은 벽돌 공장의 춘희와 금복을 사랑했던 장골의 몇몇 남자들, 커다란 서양식 극장, 코끼리와 대왕고래는 이야기의 마디 마디에 숨어서 거미줄 처럼 뻗고 또 뻗어 갔다. 작가는 결국 텅빈 음문(陰門)까지 거부하며 남성성을 갈망했던 인간의 최후의 욕망까지 끄집어 냈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이 있던가. 삶의 끝에는 분리되고 해체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주변에 있던 어부들도 물고기를 보고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금복은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의 출현에 압도되어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page 50




 '고래'가 특별한 소설이라 불리는 이유


보통의 소설은 가상으로 탄생한 몇 명의 인물이 특별한 또는 일반적이지만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 계기(사건)을 만나 소소한 이야기와 중심이 되는 하나의 테마를 완성해간다. 현대문학에서 큰 의미는 없지만 분량, 작품의도, 문예사조, 소재 등에 따라 세부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천명관의 '고래'는 장편소설이라는 점 외에는 딱히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렵다. 구비문학의 한 분류인 전래동화를 떠올리게 하다가 어느새 일본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하고 다시  에로틱소설로 갈아타는 등 탈바꿈의 연속이다. 가장 독특한 부분은 '독자'를 언급하며 불쑥불쑥 내레이션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무성영화에 변사가 등장하듯이 말이다.


독자 여러분, 그를 영영 잊은 건 아니시겠지? 다름아닌 바로 그 불운한 생선장수 말이다.

- page 180





정유정의 신작 '28'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제가 비판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중심이 되는 서사'가 없다는 점 이었다(물론 개인적인 기준이다). 하나의 큰 맥락이 소설 전반에 흐르지 않으면 흥미유발이나 감정이입, 집중도 등이 떨어져서 좋은 소설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래는 나의 저런 지적을 비웃는 듯 온갖 이야기를 고래의 분수처럼 뿜어낸다. 많은 사람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 많은 사건과 신화 같은 이야기들에서 '대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거지?'라는 생각이 들법도 하지만 나를 포함한 누구도 그런 의문을 던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좋은 소설'의 기본 요소가 필요하다는 나의 주장은 잘못된 것일까? 그건 아니다. 다만, 고래는 기존 소설의 규칙과 한계를 가뿐하게 넘어 선 것이고, 기존의 글쟁이들이 기존의 작법을 관습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에 기분좋은 채찍이 되었을 뿐이다. 소설 '고래'는 소설가 은희경의 말처럼 동시대의 소설 작품에 빚진게 별로 없으며, 신수정 문학평론가의 생각처럼 소설의 영역을 넓혔다. 나 역시 그녀들의 생각에 동의하며 수상 작품에 대한 겉치레 인사가 아니라고 본다. 그 정도만 해도 이 책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 소설 '고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위에서 말했듯이 '고래'에는 뼈대가 되는 이야기가 없다. 일반적인 소설들이 보여주는 플롯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드라지게 들어나는 주제 역시 없다. 그래서 독자가 '고래'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건 독자의 자유다. 뭔가 대단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 무엇도 될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들 조차도 '고래'의 압도적인 서사에 대해 명징하게 지적하고 분석하지 못하는 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힘인 것이다.


'이 소설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이냐?' 또한 '그렇기만 한 것이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 천명관


사실 한 편의 詩를 조각조각 내어 공부하는 대한민국 교육현실 속에서 '소설'을 분석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자체가 생경하지는 않다. 그것이 평론가들의 직업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기존의 문법을 탈피한 작품에 대해 텃새를 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천명관의 '고래'는 상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최근에 '현대문학'이라는 국내 최장수 문예지에서 '박정희 유신'이 언급 되었다는 이유로 원로 작가의 연재를 거부한 사건이 있었다. '창조경제'를 주창하면서도 문학을 하나의 정치적 도구으로 인식하는 현 정권의 저급함에 치가 떨렸다. 모든 독재국가는 예술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해야만 '사유의 힘'을 원천봉쇄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고래'에 은유적으로 등장하는 박정희가 독재자로 묘사되었다면 출판사와 작가에 대한 합법적 폭력도 가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참으로 불행한 사회다.


▲ 소설가 천명관


어쨌든 '고래'는 매우 재밌는 소설이다. 신비롭고 힘이 넘쳐난다. 과연 그런 힘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보물찾기를 하듯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니 그 역시 특정한 시대나 사건을 의식해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춘희와 금복이라는 여성을 통해 인간에 대한 철학적 본질을 자유롭게 써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어떤 형식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쓰여진 이 소설의 시작과 끝에는 개망초와 붉은 벽돌 공장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물과 줄거리가 보여주는 자유분방함 속에서 묘하게도 일관된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착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듯, 어쩌면 작가 천명관이 숨겨놓은 진짜 암호는 넓은 바다를 헤쳐나가는 거대한 고래가 아니라 잡초로 불리는 개망초 한 송이와 한 장의 벽돌 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곳에 쓰지 않겠다. 하나의 소설에서 대단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니까. 우린 천명관이 깔아준 멍석 위에서 신나게 놀다가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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