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인간 '김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로서 김훈은......인정할수 밖에 없었다. 시쳇말로 '글빨'이 참 좋다. 그래서 두 손 모두 들고 항복이다. 왜 사람들이 김훈의 글솜씨를 칭찬 하는지, 왜 필사 추천 도서로 '김훈 소설'을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같은 풋내기에게도 김훈의 문장 하나 하나가 도자기를 빗는 심정으로 나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훈은 글을 쓸 때마다 도대체 얼마나 물레질을 했던걸까. 티껍지만 그에게 찬사의 한조각을 던진다.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강산무진>은 김훈의 단편소설 모음이다. 총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는데,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발표했던 소설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김훈의 대표작인 <칼의 노래>를 읽고 싶었으나, 한 입 먹고 보고 맛이 없으면 뱉으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근데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약같은 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싫어도 꾸역꾸역 먹어볼 생각이다.
배웅 (바자 2006년 3월호)
화장 (문학동네 2003년 여름호,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항로표지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뼈 (문학동네 2006년 봄호)
고향의 그림자 (현대문학 2005년 1월호)
언니의 폐경 (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 200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머나먼 속세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
강산무진 (내일을여는작가 2006년 봄호)
허무주의 소설의 정수를 읽고 싶다면 | ||
첫번째 배웅부터 마지막 강산무진까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쳇바퀴 같은 현실의 무정함이 배어있다. 김훈이 의도적으로 이런 통일성을 부여한 것인지 그의 삶이 마치 그와 같은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작가의 글은 작가의 영혼을 닮는다고 하였으니 후자쪽에 좀 더 기울어졌을테지. 무엇이 그의 삶을 허무하게 만들었을까.
배웅에서는 중소기업 사장과 여직원 사이에서 택시기사와 애엄마로 변신한 관계를 통해서, 화장에서는 죽어가는 아내와 남편의 지독하게 인간적인 욕망에서, 항로표지에서는 떠나는 등대장과 떠밀려온 전자업체 이사의 엇갈린 운명으로, 고향의 그림자에서는 어머니의 치매와 범죄자 조동수의 어머니를 통해서, 나머진 작품들도 갖가지 사연으로 짙고 깊게 허무주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로 김훈의 정보 수집 능력이 한 몫을 했다. 여러 직업군의 인물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생동감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단편소설의 특징 상 이렇다할 줄거리는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구조에 김훈이 탄생시킨 인물들의 심경 묘사가 담담하게 폐부를 찌르듯 표현되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듯 평범하게 오고가는 일상의 대화에도 마치 김훈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것 마냥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듯한 필력은 김훈의 등장으로 한국문학이 풍요로워졌다는 신경숙 작가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화장'과 '강산무진'은 도망갈 곳 없는 현실의 막다른 골목에 갇힌 두 남자의 조금 다른 행보와 심리가 절묘하게 비교되는 작품이다. 소설은 무심한듯 담담하게 활자화 되었으나 김훈식 허무주의의 늪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고생들이 연못가에서 주전부리를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 다른 아이들이 따라서 웃었다. 웃음은 물결처럼 빠르게 퍼져나갔고 웃음이 한바탕 지나가면 또다른 웃음이 일어섰다. 웃음소리에 물위에 파문이 일고 수련의 꽃대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여고생들이 다 돌아가자 수련은 꽃잎을 완전히 닫았다.
- '강산무진' 중에서 -
화장, 지독하고 끔찍하게 | ||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보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 마음 한 켠이 짠하고, 고개 돌리는 곳마다 추억의 몸살을 부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추억을 지울수만 있다면 조금은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단편소설 <화장>은 8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강렬한 느낌을 준다. 독자는 <화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자와 그를 지켜보는 사람을 가장 리얼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호기심이 저급함은 아닐 것이다. 무감각해진 것뿐이지, 원래 인간이란 하루 하루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가 그 메마른 곳으로부터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다. 간병인이 사타구니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을 때 마다 항암제부작용으로 들뜬 음모가 부스러지듯이 빠져나왔다. 그때마다 간병인은 수건을 욕조 바닥에 탁탁 털어냈다.
뇌종양에 걸린 아내가 드디어 내 곁을 떠났다. 남편은 아내를 추억하며 현실과 동행해간다. 아름다웠고 열심히 살던 아내 덕에 집도 사고, 남편은 대학원도 졸업하고, 아들과 딸도 낳았다. 이제는 재벌급 회사에 상무가 된 남편. 그러나 살만해졌을 때 아내는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한 건 남편이었겠지만, 자신의 배설물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아내는 수치심과 미안함에 몸서리를 친다. 현실은 죽음보다 슬프고 끔직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직원을 향한 또 다른 감정을 수락한다. 아마 남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대목에서 여자들은 꽤나 분노했으리라. 장례를 치르면서도 업무를 봐야 하는 남자는 2개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탈출구였을지도 모르고, 남자 사람이란 그것을 핑계삼아 잠시나마 두번째 현실에 안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아내가 개밥을 걱정했던 것 처럼.
추은주는 블루진 바지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추은주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 머리타래가 흘러내렸고 맨발의 뒤꿈치가 도드라졌다. 뒤꿈치의 각질과 엄지발가락 밑의 등근 살도 보였다. 엎드린 추은주의 등과 엉덩이는 완연한 몸이었다.
<강산무진>이라는 표제는 조선시대 화원 화가 유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라는 산수화에서 비롯되었다. 8폭에 이르는 긴 화폭의 그림은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감상할 수 있는데,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솜씨를 겨루던 당대 유명한 인물이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김홍도와 달리 그에 대해선 모르는 이가 많다. 나역시 마찬가지지만, '강산무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흔하게 봤던 산수화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어선인듯한 선박도 있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다양한 방법으로 짐을 운반하는 백성도 있다. 숨은그림 찾기 처럼 구석구석 살아있는 것이다. '강산무진도'는 메비우스의 띠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풍경을 담고 있다. 아마도 처음과 끝을 붙여놓으면 4계절과 희노애락을 영속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훈이 <강산무진>을 표제로 뽑은 것도 그것과 관련있지는 않을까.
나는 가끔 상상 한다. 작은 뒷동산 하나가 우주라면 그 안에 떠도는 작은 먼지 하나가 지구라고 말이다. 그 안에서 100년도 못사는 존재가 1000년을 살 것처럼 피 터지게 살다가 2시간만에 재가 되어 어디론가 허허롭게 다시 흩어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이미 허무로 가득차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김훈은 <강산무진>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목에 힘주고 다니는 잘난 양반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어야 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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