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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감상문

레이먼드챈들러, 그는 나를 빅슬립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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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삐딱한 사람이 아니다. '인기', '유명'이라는 단어가 항상 따라붙는 인물, 사건 등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닐 뿐이다. 내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슬립'을 읽게 된 첫번째 이유는 순전히 소설가 '정유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과거 인터뷰에서 챈들러에 대해 '나의 신이고, 스승이고 영원한 뮤즈'라고 칭송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로 극찬을 쏟아냈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 든 생각인데, 정유정의 '7년의밤'도 아직 리뷰를 못쓰고 있는데, 그녀가 추천한 소설의 리뷰를 쓴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배신감을 느꼈나보다. 아니면 타인의 눈에는 신(神)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나에게는 '괜찮은 사람' 정도로만 보이는 자괴감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재미와 유익함을 주는 책인지 아닌지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다. 바로 '잠'이다. 내가 잠오는 것을 참아내면서 책을 들고 있느냐, 아니냐가 책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다.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읽는다'는 것의 차이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이 아니므로 일단 생략한다. 내가 추리소설을 보면서 이토록 오래 책을 잡고 있던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간 3일 동안 책을 멀리한 원죄도 있다. 그렇다고해도 책을 펼칠 때 마다 발이 돌뿌리에 자꾸 걸리는 느낌은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낯선 동네와 인물, 사물에 대한 잦은 묘사와 설명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상당히 떨어뜨렸다. 정유정에게 신이고,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영웅이었더라도 나에게는 우상이 될 수 없었다. 미국 범죄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해도 마찬가지다. 무척이나 속상한 일이다. 나는 영웅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 것 같다.

 

고전의 한계인가, 번역가의 한계인가


박현주 번역가는 '빅슬립의 힘은 사건을 묘사하는 힘에 있다'라고 했다. 그 '사건'이 등장인물간의 '갈등의 순간'을 말하는 것인지 책 전반적인 전개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후자라면 나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챈들러가 나와 안맞는 것인지, 번역자가 나와 안맞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드보일드의 건조함과 딱딱함 속에서 구린내가 흥미롭게 새어나오길 기대했던 나로서는 예상 외의 복병이었다.

 

챕터가 바뀔때 마다 대부분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묘사 형식의 설명으로 시작한다. 또 중간 중간 비유법이나 은유법의 설명이 자주 등장한다.  오래된 소설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정통적인 구성으로 보여진다. 요즘에는 사건 흐름에 따라 묘사가 조금씩 끼어드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챈들러의 잘못은 아니다. 또한 챈들러가 자신의 추리소설을 외국사람들도 많이 읽으리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가지망생들에게 들려줄 교훈


솔직히 '빅슬립'이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유별나게 묘사와 설명이 많다고 볼수는 없다. 책 두께나 크기부터 작은편에 속하고, 필요할 때 마다 대화체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챈들러의 글이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너무나 힘들었다. 이런 일이 생긴건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기본적인 '문체'의 문제다. 그의 문체를 내가 씹어먹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소설을 제대로 소화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지망생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해설자의 말을 빌리자면 '빅슬립'은 레이먼드챈들러의 단편소설들의 문장을 수정 확대하여 썼다고 했다. 처음에는 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아서 간결하고 객관적인 묘사로 일관했으나, '빅슬립'을 본격적으로 쓸 당시에는 주관적인 해석과 감성이 들어갔다고 했다. 듣고보니 차라리 원래의 문체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덜 유명해졌을까?

 



 레이먼드 챈들러를 사람들이 모르는 이유

 

 

 

 

장경현[각주:1] 해설자 말처럼 많은 사람들은 챈들러를 모른다. 나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내가 추리소설광이 아님에도 아서 코난도일과 애거서크리스티는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두번째 이유는 지금보다 훨씬 어린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코난도일'과 '애거서크리스티'의 소설 속 아련해진 재미를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실패한 것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말로' 사립탐정을 모를까. 내가 생각할 때 이유는 딱 하나다. 애거서크리스티나 코난도일이 챈들러보다 선배 작가임에도 사람들에게 더 알려진 것은 작가의 개성이 독자들의 '대중성'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두 작가에 의해 탄생된 사립탐정(주인공)들과 흥미롭고 편안하게 놀 수있었다. 그런면에서 보면 필립말로 만큼이나 챈들러의 소설은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냥 재미(?) 차원에서 보자. 위 표는 2004년 부터 구글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3명의 작가를 검색해 본 데이터다. 갈색 선부터 순서대로 애거서크리스티, 코난도일, 레이먼드챈들러이다. 이것으로 작가의 가치를 평가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글이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듯, 인기있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이해받고 싶었다.

 

 

 필립말로는 매력있는 남자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분명하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가 나체로 유혹을 해도 담뱃재를 털어 버리듯 무시해버리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농담을 즐기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간의 죽음에서도 정의와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남자.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거래와 뜨거운 키스를 사랑하는 남자. 필립말로는 그래서 아웃사이더 같은 사람이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타 작가들에게는 귀감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 대중적인 작품에 무뎌질대로 무뎌진 감성을 레이먼드챈들러가 색다른 느낌의 고전으로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챈들러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사실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점과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살려야 한다는 신념은 비교대상이 아니다. 정유정과 무라카미 하루키 처럼, 들러의 글이 어떤 소설가 지망생들에게는 새로운 우상으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일 수도 있고 말이다.

 

 

  1. 싸이월드 화요추리클럽 운영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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