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이 애국

다시는 전여옥같은 사람이 국회의원하는 일이 없기를

반응형



MB만큼이나 참 못생기고 보기싫은 얼굴, 전여옥.

얼굴만 못생긴게 아니라 마음도 참 지지리 못났습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좌파'를 '죄파'라고 썼군요. 그리고 뭐요? 범접 못할 정직함이 있다구요??? ㅋ 전씨 당신과 조전혁씨를 한나라당 개그맨으로 임명합니다. 축하드려요~ 기사하나 짧게 링크하고 원래의 작성 목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전여옥, '표절 재판' 항소심에서도 패소
항소심 재판부 "<오마이>, 전여옥에게 배상 안해도 된다"
2010-01-13 11:48:24

재판부는 "전 의원이 지인 유모씨의 취재 내용을 무단 사용했다고 인정할 직접 자료는 없지만 여러 사실을 종합하면 유씨가 일본에 관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라는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과 소재 및 아이디어 등을 무단 이용해 책의 일부를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출처] : 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58685



앞으로 조금만 더 정직하시면 영생을 할듯...ㅋㅋㅋㅋㅋ

본 포스트는 늦게나마 '알리기 동참' 차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전여옥 의원의 표절 논란에 대해 원작가인 유재순씨의 주장 중
 핵심적인 부분만 편집한 글입니다.
원글은 꽤 장문입니다만 필요하신 분은 링크를 따라가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보시고 뜨거운 관심을 보였던 글입니다. 못보신 분들을 위해 중요부분만 올려 드립니다.
최근 김미화씨 관련 발언도 그렇고 갈수록 심해지는 전씨의 이상한 주장과 못되먹은 막말과 뻔뻔함이 이 시대의 보수의 모습 같아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여옥은 정계를 은퇴해야 하다는 그녀의 주장에 나도 한표 보탠다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인 어려움을 반드시 보상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절대 합의하지 마세요! 절대!!!






‘일본은 없다’ 항소심을 끝내고 나서 전여옥과 만난 후, 19년간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풀다  
출처 :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3293&section=sc2&section2


유재순 제이피뉴스 발행인


1월 13일 아침, ‘일본은 없다’ 재판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당연한 결과지만 1심에 이어 2심도 승소했다. 


(중략)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때의 상황을 전여옥은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앞 부문 생략…원고(전여옥)가 일본에 간 지 한 2주 정도 지났을 때 유재순이 원고를 NHK 지국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당시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아울러 유재순에 대하여 호감도 갖게 되었습니다... 중간부문생략

그리고 일본에서 원고를 가끔은 써도 한국에서처럼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항소이유서 5쪽).>


2004 년, 내가 오마이뉴스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여옥은 거짓말의 천재다.’라고.


(중략)


나는 전여옥을 만나는 첫날부터 내 지인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고, 이 같은 관계는 그녀가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게다가 당시 나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80년대 중반 이후 몇 년은 매월 여성동아 원고를, 그 이후에는 우먼센스, 세계여성, 일요신문 등 시사주간지 원고를 번갈아 가며 쓰느라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아 사히 신문사 계열의 시사주간지 <아사히저널(현재휴간)>, 아사히그라프 등에도 일본르포를 쓰면서 그 틈틈이 다른 일본 주간지나 월간지에 칼럼까지 썼다. 또한, 매월 두세 차례씩 JAL항공사, 시민단체 등에 강연을 다녔다. 일본에서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6년에 내 르포집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81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의 생활(혹은 르포)을 기록한 나의 원고가 ‘신동아 논픽션’에 당선되면서, 이후 나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수년간 ‘여성동아’ 에 매월 10여 페이지 정도의 사회 저소득층에 대한 심층르포를 썼다. 또한, 주간지 ‘스포츠동아’에는 내 룸메이트였던 미국여성 메리의 도움을 받아 3년에 걸쳐 취재한 이태원 르포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본언론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1년에 두세 차례씩 강연요청이 들어 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주재 일본 특파원들이 나에 대한 기사를 꽤 여러 번 쓴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일관계가 이슈가 될 때마다 어김없이 일본에서 강연, 혹은 대담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87년 중반에 일본에 유학을 왔을 때는, 자주 일본을 왔다갔다해서인지 일본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덕분에 취재를 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동안 닦아놓은 인맥만으로도 취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의 인맥을 풀가동하여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우노 수상 등 웬만한 역대 수상을 차례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나에게 전여옥은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전여옥은 그런 말을 할 게제가 못됐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맥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에 재직하고 있던 내 친구가 자신의 후배라며 전여옥을 소개시켜 준 이유도 바로 내 인맥을 소개받기 위함이었다. 그 럼에도, 오히려 그녀는 사실과 반대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의적으로 꽃을 사 들고 간 사람에 대해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라고 마치 내가 대단히 가난한 유학생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묘사’를 했다.


(중략)


이런 연고로 94년 12월 4일 한국으로 귀국할 때, 200여 명의 일본기자들과 재일동포들이 '하품의 일본인' 출판기념을 겸한 송별회를 요츠야 사학회관에서 거나하게 베풀어 주었다. 이런 나를 가리켜 전여옥은 자신이 도와주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라고 표현을 했다.

전여옥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표현을 한 이유는, 도작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상황적 우위에 서기 위함이다. 내가 일이 없어 수입이 없고, 그래서 빈한하게 생활한다는 것을 나타내, 그런 나를 동정해서 격려하고 도와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항소이유서 또 다른 페이지에서 형편이 매우 어려운 나를 동정해서 많이 도와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도움을 준 것은 전여옥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여옥에게 내 일본인 인맥과 재일동포들을 소개시켜 주고, 그리고 집에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했다.  반대로 내가 전여옥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에 돌아가서는 거꾸로 내게 자신의 인맥을 소개시켜 주고 도움을 준 것처럼 진실을 호도했다.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항상 원고를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했고 글을 계속 쓰라고 격려했고 원고가 귀국할 때는 원고의 가재도구도 소파며 세탁기, 냉장고 등 살림이 어렵다 해서 다 주고 왔을 정도였습니다…항소이유서 9쪽).>

만약 나를 모르고 우리 집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전여옥의 이 같은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중략)


▲ 전여 옥의 항소 이유서     ©JPNews/ 김현근 

거 짓말 2. 표절 소문

<…유재순은 원고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하며 ‘일본은 없다’는 표절이라고 했습니다. 기자들도 원고에게 문의했습니다. 그래서 원고는 잘됐다 싶어 ‘그렇다면 공동 기자회견을 하자. 그래서 가릴 것은 가리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동기자회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유재순 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었습니다(이점에 관하여는 당시 이를 주선하였던 레이디경향의 유인종 기자의 확인서를 제출한 바 있음).항소이유서9쪽>

나 의 1차 일본생활은 87년 6월부터 94년 12월까지이고, 2차 생활은 99년 2월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생활한 기간은 95년 1월부터 99년 1월까지 4년간이다. 그리고 ‘일본은 없다’가 출판된 것은 93년이고.

아 마도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바로 이 기간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한국에서의 생활 동안 전여옥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버젓이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화번호나 주소를 몰랐다면 그것 또한 말이 안된다.

왜 냐하면, 95년 2월 내가 딸아이를 낳자 가장 먼저 달려온 친구가 바로 전여옥을 내게 소개시켜준 중앙일보의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전여옥과는 이화여대, 학보사 직계 선배였고, 두 사람 모두 언론계에서 일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는 관계였다. 따라서 우리 집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자회견이 있는 줄도 몰랐을 수밖에.

더더구나 기가 막힌 것은 전여옥이 기자회견을 주최했다는 유인종이라는 잡지기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1심에서는 그의 진술서도 제출했단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도 그 당시 여성동아, 우먼센스 편집장의 진술서를 받아 법정에 제출했다. 물론 기자회견에 대한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잡지의 경우, 어떤 기자회견이 있을 때는 편집장에게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은 다음에 취재를 가더라도 가야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여성동아, 우먼센스 편집장을 비롯하여 다른 매체 편집장들도 그런 보고나 사실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없다’에 대한 소문은 언론계나 출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여서, 기자회견이 있다면 일부러 찾아가서 취재를 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들은 적도,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당시 잡지편집장들은 한결같이 증언했다. 나는 당연히 이 증언을 기록한 진술서를 받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한, 2심 재판에 당시 우먼센스 편집장이 우리 측 증언자로 나와 그때의 잡지계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또 하나 더 큰 결정적인 거짓말은 내가 유인종 기자와는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유인종 기자를 처음 본 것은 2심 재판 법정에서였다.

법 정에서 우리측 송호창 변호사가 유 기자에게 물었다.

“유재순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유재순 씨의 집 전화번호를 압니까?”

“모릅니다.”

“아 니 유재순 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유재순 씨에게 기자회견을 한다고 연락을 했습니까?”

“후배가 했습니다.”

“그럼 그 후배이름은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기 억이 안 난다? 이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국회 청문회를 할 때 의원 나리들이 자신의 잘못을 에둘러 감추려할 때마다 상습적으로 남발하는 말이다.

이러면 바로 상황 끝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삼척동자라도 잘 알 것이다. 고로 '공동기자회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유재순 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라 는 말은 불필요하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100%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온 갖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하며 ‘일본은 없다’는 표절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기술했던 말도 100% 거짓말이다.

94년 12월 4일에 귀국한 나는 그때 임신 8개월이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전여옥 부부가 전화를 걸어와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대며 서울에 오면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해, 나는 한국에 귀국해서도 진짜 무서워 위해를 당할까봐 아이를 낳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 없이 조용히 지냈었다.

그때 전여옥뿐만 아니라 그 남편까지 나서서, ‘옆집 신발공장에서 똑같은 신발을 만들었기로서니 뭐가 잘못이냐. 우리에게는 돈과 힘이 있다’고 아주 당당하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전여옥 부부가 번갈아 가며 8개월 된 임산부를 상대로 험한 말을 쏟아 부을 때, 우리들의 대화를 메모 혹은 머릿속에 메모리 형태로 기록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소 우리 집에 와서 자주 밥을 먹던 유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을 나중에 서울에 귀국한 후에야 알았다.


(중략)

 

▲ '일본은 없다' 표절공방, 19년만에 풀어놓는 이야기     ©JPNews/ 김현근 

거 짓말 3. 사실 호도

전여옥의 특징과 장기는 자신의 허물을 역으로 남의 허물로 뒤집어 씌우는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 원고가 ‘일본은 없다’를 낸 지 한 2-3년 뒤 유재순은 ‘하품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는 서문부터 원고에 대한 악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에 원고는 참을 수 없어 아는 출판사에 ‘이젠 법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뒤 며칠 뒤 유재순이 책을 거두어 들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재순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쓴 책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라고 밝혔지만 원고 생각에는 소송을 할까 봐 겁이 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 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항소이유서10쪽’>


먼저 ‘하품의 일본인’이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하품의 일본인’은 일본에서 먼저 낸 책이다. 아니 원래는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이름으로 나왔어야 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 반 이상을 전여옥이 가져갔다. 대화내용, 취재수첩메모, 초고 등 가져가는 방법도 다양했다.

물론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올 때까지 나에게 단 한마디도 책을 쓴다는, 준비한다는 이야기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서울에서 전화를 걸어온 기자 친구를 통해서였다.

“야, 근데 니 책 내용이 왜 그 애 책에 다 나오니?”

그때서야 내가 철저하게 전여옥한테 당한 것을 알았다.


(중략)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 일찍 그 당시 NHK 라디오 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마츠이 히로코 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래서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 있는 ‘나카무라야’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듯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재순 씨 억울해서 어떡해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만 유재순 씨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작가잖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없어요. 전여옥 씨는 내가 친하게 지내서 잘 아는데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너무 마시고 놀기만 했어요(飲みすぎだった、遊びすぎだった).”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사실은 그날 아침 나와 만나기 전에 전여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전여옥이 자신에게 ‘일본은 없다’를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양심상 도저히 번역할 수가 없어서 거절하는 편지를 부치고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했다.


(중략)

 
▲ 하품의 일본인, 일본은 없다     ©JPNews/김현근

' 하품의 일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8년간 일본생활을 하면서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일본인이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점만을 꼬집어 정리를 한 것이다. 때문에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와 ‘일본은 없다’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하품의 일본인’의 서문에 내가 도작당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을 뿐이다. 이같은 서문 내용이 인터넷상에서 ’펌’ 형태로 널리 퍼져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솔직히 난 몰랐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나중에 비로소 알았다. 왜냐하면 2004년까지 내가 컴퓨터 사용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에서 조회 수가 그렇게 많은지도 재판이 시작된 후에야 겨우 알았다. 

오죽하면 스포츠조선에 ‘일본은 지금’이라는 타이틀로 월,화,수요일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메일이 아닌 워드로 친 원고를 매번 팩스로 보내자, 담당기자가 제발 컴퓨터 좀 배우라고 매일같이 닦달했을까. 그래서 내 별명이 ‘천연기념물’이었다.



(중략)



그때까지 나는 꽤 여러 권의 책을 내서 매번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지만, 비정상적인 홍보를 해서 책을 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줘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열심히 현장에서 취재해 기사를 쓰다 보니 특별한 선전없이도 책이 잘 나갔다.

훗 날 전여옥이 책을 팔기 위해서 표절문제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고 비난했는데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때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가 처녀출판이었고, 반면 나는 그동안 르포집, 장편소설 ‘난지도 사람들’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기본 부수만 몇만부 하는 식의, 출판계에서 일컫는 이른바 기본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 군에 속했다. 때문에 누구의 힘을 빌려, 혹은 화제를 만들어 책을 팔아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없이 ‘하품의 일본인’의 판매중지를 결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의 반응이 좋아 3개월마다 한 번씩 목돈의 인세가 들어오는 등, 정신적인 여유로운 배경도 판매중지를 결정하는데 한몫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출판사로 보낸 이 편지는 나중에 전여옥이 '소송을 당할까봐 자진 수거를 했다(항소이유서10쪽)' 고 또다시 누명을 씌워 증거물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한, 위의 항소이유서 내용 중,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같은 이야기는 바로 전여옥 자신의 이야기를 거꾸로 나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99년 일한문화교류기금을 받아 호세이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유학을 왔을 때, 오자마자 2년 동안 칼럼을 게재한 것이 바로 아사히신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도 한 달에 한 번씩 아사히신문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주재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중에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해 만나고 떠난 기자도 있다. 그리고 2,3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송년회는 한국에 나가 아사히신문,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출신 기자들과 함께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사히신문 기자들과 완전히 절연이 되었다니?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혹시 전여옥 본인의 이야기?

그리고 괄호 안의 ‘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이란 말이 있는데, 이도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에게 잘해 준 것이라고는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도무지 하나도 없을뿐더러, 나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도 아직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본 여행 도와준 것이 피해라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거짓 4. 'TV 아사히'의 날조

2심 재판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한 가지 느낀 사실이 있다. 전여옥이 블랙코미디 전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원고가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원고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피고들은 원고를 비방할 목적으로 원고가 유재순의 저작물을 표절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오선화 문제이고 거의 모든 주일 특파원들이 다뤘던 문제였습니다…항소이유서 18쪽>

‘원고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피고들은 원고를 비방할 목적으로..’ 이것은 ‘일본은 없다’ 121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어쩌랴. 전여옥의 이 주장 자체가 100% 거짓말이니.

그럼 121페이지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일본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점에서 어떤 한국인이 쓴 것 같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름은 ‘스카트노 가제(スカートの風)', 우리나라 말로 ‘치맛바람’이란 뜻이었다…중간생략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사히 텔레비전에 나온 그 책을 쓴 오선화라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카사카와 신주쿠의 한국인 호스티스의 이야기를 하며 몹시 거칠고 서툰 일본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온 호스티스들의 꿈은 일본남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녀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너무나 살기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중간생략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그토록 욕을 하고 미워하는데도 너그러움으로 그것을 감싸며 한국인들에게 잘해 주고 있습니다.”

오선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한국사회는 지독하게 부패했습니다. 모두가 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중간생략

나도 사실은 육사생도나 군인과 결혼하는 것이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여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나 육사생도와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 영문학을 공부하러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오선화는 흥분한 듯 말했다.

“일본사람들은 정말로 너그럽습니다. 나는 사실 한국인과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위 문장대로라면 분명 전여옥의 주장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선화가 텔레비전에서 말했다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내가 쓴 초고와 너무나 똑같았다.

▲ '일본은 없다' 중에서 오선화 부분    ©JPNews/김현근 

나는 오선화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1년 넘게 그녀의 행적을 추적했었다. 그 과정에서 ‘스카트노 가제’로 인해 지도교수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도쿄대학 대학원 유학생도 만났다.

나중에는 그 유학생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오선화에 대한 취재를 다니기도 했다. 이 유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은 없다’ 126페이지에 나온다.

<…앞부분 생략…흥분한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이러한 책이 나오지 못하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깎아내리는 이 형편없는 책을 교재로 쓰겠다는 일본인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을 가장 객관적으로 본 책’이 나왔다며 세미나 주제로 삼아 한국인 학생들에게 억지토론을 시킨 일본인 선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교수들은…중간생략

…그래서 교수와 설전을 벌이다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학생도 많고 어쨌든 학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치사하고 억울해도 분을 삭이며 두고 보자 하면서 듣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틀리게 기술한 부분까지도 전여옥은 그대로 자신의 책에다 인용했다.

‘그래서 교수와 설전을 벌이다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학생도 많고’

사실은 오선화의 책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간 유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취재과정에서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전여옥은 이렇게 잘못 취재한 내용마저 마치 자신이 진짜 취재한 것처럼 버젓이 ‘일본은 없다’에 기술했다.

또 하나 도작문장의 실례를 들어보자.

'한국인들이 한국을 가장 객관적으로 본 책’이라는 표현은 도쿄대 유학생이 나와 인터뷰를 할 때 지도교수가 한 말이라면서 내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그대로 원고에 썼다.

그런데 이 적확한 표현이 그대로 전여옥의 책에 인용됐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떻게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녀의 책에 나올 수 있나. 더구나 그 유학생은 전여옥을 만나기는커녕 전화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중략)


먼저 TV 아사히를 찾아갔다. 그리고 오선화가 출연했는지의 여부부터 확인해 봤다.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오선화가 '아사히'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한 자체가 없었다. '한국은 성형 천국'이라는 한낮에 방송하는 와이드쇼에 나와 잠깐 몇 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번에는 다른 채널의 출연분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없었다. NHK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 역시 ‘일본은 없다’ 121-122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결국 '일본은 없다'121-122페이지에 나오는 오선화의 TV출연은 100% 전여옥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중략)


▲ 일본 은 없다 중  포스트 잇으로 체크한 도작 부분. 책의 대부분이 포스트 잇으로 덮혀있다.   ©JPNews/ 김현근 


거짓말 5. 좌파정권과 좌파언론이 사주했다?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르포라이터로서 현장취재를 해왔지만, 정치색깔을 나타내는 기사를 쓰거나 그 어떤 정당에 적을 둔 적도 없다. 

언론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내가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것은, 현장의 ‘있는 그대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좋은 것은 좋은 것 그대로, 나쁜 것은 나쁜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르포라이터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중략)

나중에 이 연재물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강연차 어떤 모임에 갔을 때, 관중의 몇 사람이 대한의 딸들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나!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었노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처럼 이태원의 실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이 목숨을 건 르포를 두고 전여옥은, ‘대학졸업 여부도 확실치 않고 (아마 신정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나를 비하하려는 의도를 갖고 표현한 듯) 르포작가로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책을 낸 것– 제목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태원의 여왕벌’ 하는 식의 제목으로 기억됨- ’이라고 항소이유서(6쪽)에 적고 있다.

하긴 표절의혹을 제기하는 일본주간지의 전화인터뷰에서도 전여옥은, '자신은 일류대학 출신의 공영방송기자이 고, 유재순은 3류대학의 프리랜서’라고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비하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표절의혹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아 비웃음만 샀다. 그런 전여옥이니 목숨을 건 르포 따위야 아무런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인터뷰를 한 일본주간지 기자가 오히려 내게 되물었었다.

"그 사람 일본특파원 지낸 것 맞습니까?"


(중략)


▲ '일 본은 없다'에서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미조라 히바리'라고 기술했다. 이는 유재순 발행인이 초기에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JPNews/ 김현근 

아무튼, 내 직업은 현장중심의 르포라이터다. 성격이 이런 만큼 전여옥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무현 좌파정권이나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의 꼬임에 넘어가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고 할 만큼 좌지우지될 그런 성격이 결코 아니다.

1심 승소 후, 전여옥이 패소의 변으로 '노무현좌파 정권과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가 유재순을 앞세워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일체 오마이뉴스와 접촉을 하지 않았다. 2심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이 한국을 오가면서도, 오마이뉴스 기자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피했다.  


(중략)

 

2심 재판정에서 현재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출신 영사부인이 이런 증언을 했다.
 
"전여옥 씨의 특파원 시절, 우리 부부가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씨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자기가 책을 쓰고 있는데 유재순 씨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특파원이 취재한 내용도 들어 있다고 본인한테서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한 일본인 외교관 부인은 그날 저녁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다시 한번 주둥이를 잘못 놀리면 네 혀를 잘라 놓겠다. 그리고 네 남편을 한국에서 추방시켜 버리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외교관의 집 전화번호를, 그것도 부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된 일본영사의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것이다. 특별한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일반인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집 전화번호는 아니다. 결국, 재판과 관련된 사람이 협박전화를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수밖에 없다.        


(중략)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미안하다'라는 사과 한마디였다. '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이 과하다보니 본의아니게 네 것을 좀 가져다 쓰게 됐다. 미안하다.' 이 말이면 나는 그냥 덮어둘 생각이었다. 내 성격에 친구가 좀 욕심을 냈기로서니 하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내심정이었다.

 
그런데 전여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질겅질겅 짓밟는 것도 모자라 학력비하에, 목숨을 걸고 취재한 르포까지 천박하다고 몰아세우고, 내 주변사람에게는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이간질을 시켰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내라고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다.    

 
(중략)

 

   
이제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지금까지는 그저 힘있는 그녀를 방어하기에만 바빴다. 그것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온갖 거짓말과 술수를 워낙 잘 쓰는 그녀의 본질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권모술수에 아주 능한 전여옥이 또 어떤 논리와 왜곡, 모함을 가지고 공격해 올지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당한 만큼, 내 소중한 가족과 지인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은 그 몇 배만큼, 온전히 되돌려받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이제부터 조용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내 책 내용으로 전여옥 입맛에 맞게 그 내용을 왜곡해서 일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 그 행태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나는 일본의 있는 그대로를 전해주려고 했지, '일본은 없다'라는 제목처럼 그렇게 극단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왜곡하고 각색해서 반일, 혐일감정을 의도적으로 심어주려는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 전여옥은 남의 책 내용을 계획적으로 도용해 자기 입맛에 맞게 대단히 선동적으로 각색해서 '일본은 없다'를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일본에 대해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증오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재 일본 모습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일본을 바로 아는 것이기에, '도작사실'부터 분명하게 정리를 한 다음, 다음 행동에 나설 것이다.      
 

■ 편집자주
 
이 글은 이번 2차 '일본은 없다' 관련 항소심 판결에 대한 유재순 제이피뉴스 발행인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입니다. '보도자료'를 대신해서 작성한 것이므로 인용 및 전재, 재배포가 가능합니다. 



여기까지 입니다.
현재 전씨는 대법원까지 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때도 패소하면 그때는 과연 뭐라고 변명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판사가 정치적인 판결을 했다고 혼자 방방 뛸까요? 유재순씨는 정치인도 아닌데 말입니다. 내가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야, 이분 상당히 고지식하면서 엄청 정직하고 성실한 분이구나'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부류들이 꼭 있습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인간들때문에 어지러워지고,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번기회에 유재순씨의 다짐처럼 당당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이 승리하는 세상이 되도록 부탁드립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뭘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