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바람이 우리를 스쳐지나 갈 때면 중첩되거나 깊어지는 감정을 소유하게 된다. 슬픔은 더 진하게, 기쁨은 더 신나게. 때로는 두가지를 한꺼번에 밀어준다. 바람 친구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머릿속에 공기만 가득채우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못하게할 때도 있다. 그것은 바람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때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재밌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쓸쓸한 이야기 일수도 있고, 아주 놀라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주 집중해야 한다. 초속(m/s)으로 느리게 말하기도 하고, 시속(km/h)으로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람의 나라에는 거풍과 소풍이 사이좋게 지낸다. 결코 싸우는 법이 없다. 한 녀석이 몰려오면 한 녀석은 군소리 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크고 힘세다고 작은 바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서로의 입장은 언제든지 뒤바뀐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울림이다. 다만, 알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낼 때는 조심해야 한다. 지도를 새로 만들어야 할 만큼의 분노를 보일 때도 있으니까. 굵고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경고와도 같으니까. 바람이 건네는 그 투명한 언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는바람 : 약하게 솔솔 부는 바람 (당신에게 귓속말을 하는군요)
간들바람 : 부드럽고 가볍게 살랑살랑 부는 바람 (유혹하고 싶은가봐요)
강바람 : 비는 내리지 않는데 거세게 부는 바람 (심술이 났어요.)
건들바람 : 초가을에 선들선들 부는 바람 (여행이 가고 싶데요)
고추바람 : 살을 에는 듯이 매섭고 차갑게 부는 바람 (질투심이 발동됐어요)
꽃샘바람 : 꽃이 필 무렵에 부는 쌀쌀한 바람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군요)
내기바람 : 산비탈을 따라 세게 불어 내리는 온도가 높거나 건조한 바람 (심심한가봐요)
높새바람 : 태백산맥을 넘어 영서지방으로 부는 고온 건조한 바람 (자기 말 좀 들어달래요)
들바람 :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 또는 들에서 부는 바람 (너무 멀리가지 말래요)
명지바람 :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왠지 설레이는 기분이래요)
문바람 :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혼자있기 싫다는군요)
박초바람 :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바람 (신나게 놀고 싶답니다)
벼락바람 : 갑자기 휘몰아치는 바람 (산에 걸려 넘어졌대요)
북새바람 : 북쪽에서 불어오는 추운 바람 (잠시 길을 잃어버렸대요)
산들바람 :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바람 (졸려서 자고 싶다고 합니다)
살랑바람 : 살랑살랑 부는 바람 (따라오라는군요)
색바람 : 이른 가을에 부는 신선한 바람 (춤을 추고 싶답니다)
서릿바람 : 서리가 내린 아침에 부는 쌀쌀한 바람 (슬픈일이 있었답니다)
소소리바람 : 이른 봄에 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고 매서운 바람 (짜증나는 일이 있었답니다)
솔바람 : 소나무 사이를 스쳐 부는 바람. (소나무 친구를 소개하고 싶답니다)
솔솔바람 : 부드럽고 가볍게 계속해서 부는 바람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용오름 : 육지나 바다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바람의 소용돌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생겼어요)
왜바람 : 방향이 없이 이리저리 함부로 부는 바람 (복잡한 생각이 있어서 괴롭답니다)
황소바람 :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 드는 바람 (무서운 꿈을 꾸었대요)
흘레바람 : 비를 몰아오는 바람 (울고 싶은 일이 있었답니다)
※ ( )안의 표현은 제가 느끼는 감정을 임의로 지정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람'을 '자유'와 빗대어 이해한다.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바람은 한 곳에 머무를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다. 그러니 온전한 자유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바람은 가장 고독한 존재인지 모른다. 그래서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고독해보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