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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감상문

조지오웰 1984, 애국자들의 민주적 독재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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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1984, 애국자들의 민주적 독재국가

'민주적 독재국가'. 이 단어가 정치학에서 통용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민주적'이라는 말과 '독재'라는 말은 상충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떠오른다. 서로가 혼재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2014년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떨까. '독재'를 위해 '민주적' 가면을 쓰거나,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이 시대 권력자들에게 남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84 - 8점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민음사



1948년에 쓰여진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현실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언제부터 인가 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허락되지 않는 자유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다. 모든 일은 그것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일, 그것은 인간으로서 권리도 만족감도 공동체 의식도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윈스턴이 살았던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시대 주류세력이 주창했던 슬로건에 잘 나타나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왕으로 군림하고 싶다면 애국을 강조해라?!





나는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이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주장을 펼 때마다 구토가 올라온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권력 유지'이기 때문이다. '진실' 따위는 국익을 약화시킨다. 자유는 통제에서 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일명 '수구꼴통'으로 지칭되는 한국의 보수세력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인 것이다. 그들은 안다. 적을 만들고 사회 불안감을 조성하면 미개한 국민들이 자기들 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여러 공장과 직장에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이 깃발을 든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탁월하신 영도력으로 우리에게 새롭고 행복한 삶을 주신 빅 브라더께 감사드린다고 목이 터쳐라 외쳤습니다. 여기 목표 달성이 완료된 통계 수치가 있습니다......(중략)

......터무니없는 통계 수치가 텔레스크린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다.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던 '독재자의 딸'

그러나 한국에서는 '반신반인의 딸'



민주주의 원칙 중 한가지는 '다수결의 원칙'이다. '선거'라는 제도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착한 이유다. 그럼 '선거'를 하는 나라는 모두가 민주주의가 잘 발달된 나라일까? '선거'는 과정이지 공정한 결과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 국정원, 국군사이버사령부가 개입한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보라. 진보세력보다 더욱 민주주의를 신봉해야 할 자칭 애국보수들은 분노는 커녕 비판하는 사람들을 '종북세력'으로 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 정도면 애국보수들은 보통의 국민이 아니라 노예수준이다. 나라의 안녕과 국익을 위해서 박근혜 지키기가 애국이라고 착각하는 광신도 노예말이다.


그는 뚱뚱하면서도 활동적이었는데, 바보처럼 어리석은 데다 맹목적인 열성분자였다. 당의 안정성은 사상경찰보다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충성하는 이런 유의 인간들에 의해 유지되는 셈이다.


책 속 다수의 오세아니아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불만과 불편은 충성심을 요구하는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로 여긴다. 정기적으로 분노의 시간을 갖고, 끝없이 적개심을 키우는 일정에 순종한다. 진실과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라도해도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를 다수가 원하면 그곳을 민주주의 국가로 봐야될까? 아리안 혈통의 자긍심이 높던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도 초기에는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인권과 정의가 배제된 가짜 민주주의가 존재했던 역사라면 가짜 왕, 가짜 대통령도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공포정치와 조작이 필요한 곳은 독재국가뿐







민간인 사찰은 독재국가의 특징이다. 그러나 민간인 사찰을 하는 나라가 곧 독재국가인 것은 아니다. 모든 권력은 통제의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인권이고 언론이고 다 필요없다. 자신의 권력에 저해된다는 판단이 서면 상대가 누구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파멸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핵심은 민간인 사찰이 들통 났을 때이다. 수사 의지와 방향을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알 수 있다. MB정권에서 자행된 총리실 민간인 사찰건이 터지자 보수신문과  그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은 노무현때도 있었다며 물타기를 시도한다. 내 기억에 정부 옹호해주는 댓글 알바가 그때도 많이 활동했었다. 결국 크게 처벌받은 사람없이 흐지부지된다. 최근의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 건도 마찬가지.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취득 및 공유한 것에 검찰은 주목하지 않았다. 청와대의 하수인들 마냥 검찰은 언론플레이를 하며 사생활에 대해 '사실상 맞다'며 '채동욱 찍어내기'가 아니었음을 청와대 대변인처럼 주장한다.


<1984>에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서로가 감시의 대상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반역자', '사상범'으로 신고를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만 아이들은 훌륭한 애국자가 된다. 그런 아이를 남은 부모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과거의 '공포정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공개처형은 오늘날 장악된 언론사를 통해 '망신주기'를 그대로 닮아있고, 끔찍한 고문은 오느날 '밥줄 끊기'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자행되는 부당하고 가혹한 처벌은 부패한 권력층이 즐겨쓰는 방식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작사회는 부당한 권력의 생존터이다. 진짜와 가짜를 혼란에 빠뜨리고, 껍데기와 본질을 뒤섞는다. 없는 사람도 만들어내고, 살아있던 사람을 태어난 적도 없는 사람으로 바꿔버린다. 패배는 승리로, 승리는 완벽한 승리로 쓴다. 가짜라는 증거조차 남아있지 않아 반대 의견의 힘을 무력화하고 체념하게 만든다. 숫자 바꿔쓰기는 일상이고, 사무실에 있는 휴지통은 '기억통'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권력에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는 '신어'라는 시스템에 의해 변경되거나 아예 '없는 단어'로 만들어 버린다. <1984>의 사회는 모든 것이 조작, 왜곡, 불분명하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면서 자국의 근대사는 버젓이 왜곡하고, 세월호 참사에서 대중들에게 들통난 TV뉴스의 거짓말처럼. 1948년에 쓰여졌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1984>은 통찰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윈스턴,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자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겠나?"
윈스턴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1984>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보다 그것에 저항하는 한 개인이 어떻게 파멸되어가는지에 촛점이 맞춰진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서같은 소설인데 현존하는 독재국가의 모습이 어떨지 충분히 그려볼 수 있는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1984>는 러시아 작가 E. 자마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20세기에 나온 3대 「디스토피아(부정적 미래) 문학」으로 꼽힌다. 1920년대 작품인 「우리들」은 동구 관료독재체제의 공포, 1930년대에 나온 「멋진 신세계」는 과학만능주의로 인한 사회의 변질을 그린 것이다.


나는 <1984> 후기를 통해 한국의 애국보수들이 이어가는 독재의 잔재를 비판하고 싶었다. 그러나 쓰면서 회의가 들었다. 단순한 무지는 배움으로 탈출할 수 있지만, 탐욕을 채우기 위한 맹목적 믿음은 바꾸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세아니아'는 공포정치와 조작으로 유지되는 나라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비판적인 사람들을 체포해서 '나는 틀렸다' 라는 자백을 받은 후 결국 죽여버린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국익이나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다. 권력자들의 속마음은 오직 그것뿐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이 있다. 희미했던 것을 분명하게 보았음으로 희망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큰 절망이었던 대목이다. 2014년 우리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데 282쪽에 나온다. 이것을 끝으로 너무나 부족한 리뷰를 마친다. 아, 한마디만 더 하자. 우리 쫄지말자.


이들 세 집단의 목표는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상층계급의 목표는 현재의 상태를 고수하는 것이고, 중간계급의 목표는 상층계급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하층계급이 목표를 가졌다면 그것은 모든 차별을 폐지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유사 이래 본질적으로 똑같은 투쟁이 끊임없이 반복하여 일어났던 것은 바로 이처럼 저마다의 목표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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