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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당당한 고백 "우리는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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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당당한 고백 "우리는 '친일파'다"
[김영종의 '잡설'·22]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③
기사입력 2010-07-12 오전 7:45:20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③

그러면 시대를 건너뛰어 뉴라이트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의 핵심 이론인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제 강점기 민족개량주의 이론의 현대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보수라면 얼마든지 장밋빛 이념을 내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많은 이론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 이론을 들고 나왔을까? 낡아빠지고 친일파를 옹호하는 이 이론은 이른바 보수 우파의 거짓 없는 자기 고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말하자면 이제 조작을 그만두고 정확한 이름을 찾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이다.

뉴라이트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불어닥친 세계화의 물결, 신자유주의와 네오콘(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득세, 민주정부 10년이라는 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자기를 무장했다.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화두가 쇠퇴하고 '선진화'가 급부상하기 좋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정권이 민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관계로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과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민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비교가 된다.) 게다가 민주정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흐름 속에서는 이념보다는 전문성이 각광을 받았다. 동시에 고급 교육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뉴라이트는 이념에 구애받지 말고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 특히 역사 문제를 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구명하자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여기에다 높아진 국민의 교육 수준—그 결과, '합리성'이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된다—도 한몫해 새로운 의미 조작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합리성·전문성·객관성 등이 사회 운영의 원리로 자리 잡으면서 뉴라이트는 그들 선배들이 명분으로 내걸었던 민족의 짐을 벗어던지고, 옛� 역사를 오직 '발전'이라는 객관적 사실에만 근거하여 민족 감정에 치우침 없이 실증적으로 구명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그것만이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는 이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선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선상에서 이명박 정권은 사회 발전의 방향을 '선진화'로 확정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선진화'는 가장 식욕 좋은 '욕망'이 된 것이다. 과거에 '민족'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는 그 자리를 '선진화'가 차지했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옛 선배들의 전례를 본받아 적반하장 식으로 이 단어를 선점했다.

어떻게 적반하장인지 간단히만 보자.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선진화를 가로막은 게 누구인가?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산업화의 주역이라고 금과옥조처럼 말하는데, 과연 그 진정한 주역은 누구인가?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 주역은 '민(民)'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산업화의 청사진'에 따라서 '민'을 조직하고 끌고 간 지도력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그 공(功)을 자기들(군사 독재 세력)에게 돌린다. 이름하여 개발독재.

이런 의식이야말로 치졸함과 무식의 소치인데,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겠다. 첫째, 건물이 청사진에 따라 지어진다는 생각은 그릇된 환상이라는 사실이 20세기 학문의 성과로 밝혀졌다. 건물은 건축가가 짓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낸 결과다. 둘째, 이러한 수구 세력의 허위의식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권위주의 문화, 대규모 도시 빈민의 양산, 폭력과 사회 갈등 등 그 사례는 하도 많아서 일일이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다. 셋째, 그러한 흙탕물을 민(民)이 삶 속에서 정화했다.

이처럼 적반하장으로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그 공을 가로채서 '선진화'라는 단어를 마치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양 채택했다. 선진화를 내세운 이들의 언어 조작은 벌써 도를 넘은 지 오래다. 공기업 민영화를 비롯해 가스, 수도, 전기, 국민건강보험 등의 민영화 계획이 국민 여론의 벽에 부딪치자 이를 '선진화'로 이름만 바꿔 시행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시위 문화의 선진화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마당에, 아마 조금 있으면 언론 통제를 위해 국민 여론의 선진화라는 말도 만들어낼 것 같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한테 '선진화'를 선점당한 민주 진영은 '선진화'에 대항할 '진지'(단어)를 구축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실제의 진상을 오도한다고만 할 뿐이다. 즉 "선진화는 그게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민주 진영이 '진정한 선진화'라도 추구하고 있다는 건가? 정치판을 '가짜 선진화' 대 '진짜 선진화'의 구도로라도 짜야 한다는 건가?

이처럼 선진화의 내용은 정파에 따라 서로 다를지라도 선진화라는 말은 정파를 불문하고 한국 사회의 방향타가 되었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에서조차 선진화라는 말을 무슨 수로 부정하겠는가? 우리 사회가 선진화돼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용철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석기 전 경찰청장이 눈물 흘리며 용산 참극을 거룩한 성전에 제물로서 바친 하느님이요,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고 법과 질서를 지켜야 했기에 용산 참극을 초래한 잘못에 대해 결코 국민 앞에 사과할 수 없었던 하느님이요, 수구 세력들이 용산 참극을 색깔론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하느님, 그 하느님의 실체가 바로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선진화'라는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을 제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이 나라에서 선진화의 실제 기능은 '부자 되게 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이 나라는 선진화라는 의미를 조작하거나 왜곡할 필요도 없이 거짓 선진화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이른바 '이념을 제거한 실용주의'를 주창하면서 좌파를 선진화의 발목을 잡는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매도한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떠올려보라. 민주정부 10년 동안 개인주의가 얼마나 팽배하고 '부자 되세요'와 '웰빙'이 얼마나 붐을 이루었는지.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활약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이 기름진 토양 위에서 핀 꽃이 현 정권이 내거는 '선진화'다. 이들은 오직 돈이 목적인 사업을 계획하면서 여론의 반대에 부딪치면 선진화라는 말로 바꾸고 있다. 선진화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만 해도 그렇다. 이중질곡의 시장에서 의미를 왜곡하려면 독재가 필요했는데, '선진화'에 이르러서는 의미의 왜곡이 불필요해지면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자진해서 왜곡된 의미를 진정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 쟁취한 민주화의 내용이 그 알량한 다수결 원칙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사회는 가짜-선진화의 독무대가 되기에 안성맞춤인 토양을 제공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돈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비옥한 토양에서 뉴라이트는 '식민지 근대화⟶박정희의 개발 독재에 의한 근대화⟶선진화'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뼈대를 새 교과서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재벌을 물적 기반으로 하는)을 향한 이론 구축 작업이다. 이대로 가면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6·2 지방선거에서 보았듯이 아직은 우리 국민에게 이를 저지할 힘이 있다. 문제는 정치 세력이다. 민주 세력이 파시즘에 대항해 어떠한 민주주의를, 어떠한 사회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그 대안을 제시하면서 선진화의 허구를 정면으로 돌파해야만 하는데, 과연 정면 돌파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의 주제도 아니려니와 내 능력을 벗어난다. 다만, 내 나름대로 선진화의 허구와 관련해서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글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에서 철저히 비판했음을 말해둔다. 그리고 '선진화'에 대항할 민주 진영의 '진지'(단어)로서 '자연화'를 제안한다.

펜이 칼보다 무섭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언어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은 언어 조작술을 통해 권세를 누려왔다. 그들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빨갱이라는 말을 생산한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빨갱이가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이른바 우파들이 현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빨갱이라 하기는커녕 얼마나 잘 모시는지를 보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는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마와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그러니까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욕심에서 나봇이 하느님을 욕했다고 누명을 씌워 죽일 때와 같은 상황에서 쓰는 말인 것이다. 이 빨갱이야말로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들이 자기 존립을 위해 만들어낸 환영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유령이다.

이 유령 때문에 한국의 정치판은 아주 기형적이 되었다. 우파를 기준으로 정파들의 위치가 자리매김 되는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우파가 없다는 사실은 참혹한 비극이다. 가짜-우파는 허상의 좌파를 설정하여 김대중과 노무현을 임의적으로 그 자리에 세우고서 '좌빨', 즉 좌파 빨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과연 전 세계적인 우파 정책인신자유주의를 추진한 두 사람이 좌파일 수 있을까? 정치인과 정당의 성향을 정책을 바탕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토대로 한단 말인가! 더욱이 김대중은 김성수 일파의 한민당을 계승한 옛 민주당의 신파(新派) 출신 아닌가? 그리고 그가 이끈 정당에서 나온 노무현은?

이들이 이끄는 세력을 사람들이 좌파라고 부르는 순간, 우파 활동이라는 이름이 가리켜야 할 실제 대상(민주정권의 정치 활동)을 좌파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기형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또 신자유주의 정책 탓에 빚어진 심각한 양극화가 마치 좌파가 내놓은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실제 좌파의 정책은 그 그늘에 묻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정명(正名)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MBC에 정명을 찾아주는 일'-지난 2008년 방송문화진흥회 20주년 기념식장에서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MBC를 비난하기 위해서 한 말. "MBC는 공영방송인가 공민영방송인가 민영방송인가. 과연 MBC의 정명은 무엇인가를 돌아볼 시점이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름들의 정명을 찾아주는 일이다.

이데올로기 조작은 이름의 의미가 지닌 정신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의미의 공급자이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이데올로기 조작의 주역을 맡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은 공급자 일변도의 언어 시장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소비자운동이다.

정명은 사용자가 붙여줄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원칙은 실제 쓰임새와 일치하는 이름만을 구매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소비자가 모든 불량품과 허위 제품을 반품하고 불매 운동에 나서야 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0711212846&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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