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 왕이 된 남자, 한국정치에 올려진 노무현의 팥죽
★★★★★★★★★★/감독 추창민 /출연 이병헌, 류승룡, 한효주, 김인권, 장광, 심은경 외
광해 : 왕이 된 남자, 한국정치에 올려진 노무현의 팥죽
별점수를 100개 정도 주고 싶은 한국영화다. '광해'를 개봉했을 당시 인기가 매우 높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괜찮은 영화인지는 몰랐다. 우선 이 영화는 '역사영화'가 아니다. '정치영화'도 아니다. 물론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노무현'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고 고백했지만, '노무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추창민 감독의 말처럼 '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과거에 필요했던 왕, 2014년 현재에 필요한 대통령. 그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동일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오랜만에 명작카테고리에 이 영화를 올린다.
(스포일러 없음)
실제 역사와 다름을 비판하는 이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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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알려진 것 처럼 이 영화는 광해군 시대에 사라진 15일간의 실록을 영화적 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 제목이 말해주듯 광해군 시대에 있었던 실제 역사를 차용한 작품이다. 실제와 상상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해석도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 다큐멘터리'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제위 시절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인목대비(선조의 둘째 부인)과 항상 긴장관계였다는 것을 표현했어야했다는 주장, 천민인 하선(이병헌)이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설정, 허균(류승룡)이 도승지였다는 것은 완전한 허구라는 것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광해'는 그 시대의 왕이었던 '광해'를 이해하는데 큰 부족함이 없었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신드롬이 형성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실제 역사와 비교했을 때 어떤 부분이 빠져있고, 설명이 부족했는지가 궁금하다면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역사를 공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영화 '광해'는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이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그것만으로 영화적 완성도와 우리가 얻어 갈 것은 너무나 충분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해 가짜 왕이 필요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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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왕에 대한 시해위협을 피하기 위해 광대 하선은 왕노릇을 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가짜 왕이면서 일종의 제물이 된 것이다. 이 부분이 영화의 테마를 완성하는 지점이고,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설정이다. 하선은 왕의 권위와 권력, 풍요로움을 만끽한다. 동시에 왕의 뜻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궁궐 안에서 정치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권력집단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흥정의 대상이다. 하선이 진짜 왕이었더라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하선은 도승지의 말에 따라 움직이다가 돈이나 받고 나가면 그만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둘 다 허수아비 왕이었다.
영화에서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는 임진왜란을 겪은 백성들의 삶이 임금 앞에 놓여져 있었다. 임금이라면 그것을 가장 먼저 돌봐야 했다. 궁 안에서 권력놀음을 하는 동안 백성들은 마른 잡풀처럼 쓰러졌을 것이다. 백성들은 진짜 왕이 절실했다. 예나 지금이나 용포를 펄럭이며 폼만 잡는 왕은 백성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지 않은가.
가짜에게는 없고, 진짜에게는 있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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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메세지가 있는 지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다. 정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하선. 고관대작들 앞에서 가짜 왕노릇이 끝나면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내관에게, 기미나인에게 건내는 따듯한 말 한마디. 그것이 가짜 왕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권력과 권위보다 큰 힘을 발휘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공감은 하지만 현실세계의 정치를 감성적으로 할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한민국 극우보수들이 불리할 때 마다 즐겨쓰는 '감성팔이'를 한다는 것이다. 누가 현실에서도 하선의 저런 태도로 정치를 하라고 했나. 내가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생각이 있다. 한국 정치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진심이 없다고. 가짜 왕 하선은 바보가 아니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도 일찍 감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하선은 정치를 할 수 없었지만,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정신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을 뿐이다.
온갖 명분을 내세워 자기 배를 불리는데 힘을 쓰며 백성에게 세금폭탄을 지우고 전쟁터로 내몰면서 강대국에 의지해서 나라를 꾸려가려는 '애국팔이' 모사정치꾼이 되기 보다는 거친 손으로라도 자기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임금이 열갑절 백갑절 귀한 인간이 아닐까. 하산의 그런 마음이 2014년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 당시에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란 말인가.
하선이 보여준 진짜 임금의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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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선이 가는 곳마다 사람냄새가 난다. 모략과 정쟁이 난무 하는 곳에서도 웃음 꽃이 핀다. 반대세력에게 가족을 잃은 중전의 입가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왕을 보필하지만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내관에게도, 평소라면 용안도 제대로 못볼 기미나인 사월이에게도 가짜 왕 하선은 미소를 선물한다. 끝내는 도승지의 미소까지 만들어내는 재주를 보인다. 사람이 행복하게 웃어 보이는 일. 그처럼 어여쁜 모습이 또 있을까. 그런 모습을 보는 이의 마음은 또 얼마나 따듯해질까.
왕이 해야할 궁극적인 일은 바로 그것이다. 백성을 웃게 만드는 일이다. 백성 모두가 부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왕의 책무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받아주고 다독여주는 일이다. 억울함이 없도록 공명정대하게 법을 집행하고,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왕이 진짜 왕인 것이다.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광해군의 대동법, 호패법, 실용외교는 백성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결코 나오지 못할 정책이었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현재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왕은 누구인가. 그가 당신을, 당신의 이웃을, 이 사회를 진정으로 웃게 만들고 있는가.
노무현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이 영화는 인간 노무현을 떠올리게 만든다. 권위주의와는 처음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았으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그를 말이다. 영화 속에는 생전에 노무현이 내뱉은 말이 대사로 등장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집권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인기가 없었으나 그가 떠난 후 재평가를 받은 것 역시 광해를 닮아있다. 또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후 유배지에서 일가족 모두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광해의 마지막 길도 그렇다. 참으로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가지만 더 언급하고 리뷰를 마치겠다. 영화 속에서 기미나인들이 식사를 하는 방법은 왕이 남긴 음식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하선은 팥죽 하나로 상을 물린다. 여기서도 하선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근데 궁금하지 않나. 작가는 그 많은 음식 중에 왜 하필 팥죽을 선택했는지 말이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팥은 사람 몸에 좋은 효능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독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팥죽을 만들 때는 첫번째 삶은 물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러면 맛도 좋고 암예방과 다이어트에도 좋은 음식이 된다. 남녀노소 누가 먹어도 건강해지는데 도움이 된다.
어쩌면 노무현이란 사람은 한국정치에 있어서 팥죽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대학을 안나왔다고, 서민처럼 말한다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는다고, 미국에 굽신거리지 않는다고 그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허구헌날 막말을 들었고 조롱을 당했다. 그들에게는 노무현의 저런 성향이 '독성'으로 보였을 것이다. 만약 노무현에게 '독'이 있었다면 그건 '팥 속의 독'이었을 것이다. 팥 효능을 2가지 추가한다면 혈액순환과 해독작용이다. 한국정치가 노무현의 팥죽을 먹어야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세월호 유가족을 대신해서 청와대에 팥죽 백 그릇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