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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영화

영화 '창수', 약자에게 사랑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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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덕희/출연 임창정, 손은서, 안내상, 정성화




영화 '파이란'이 생각나는 '창수'는 임창정 특유의 건달 연기를 다시 맛볼 수 있는 영화다. 가수와 배우를 오가는 임창정의 능력은 정말 부럽기 그지 없다. 개인적으로 가수 임창정을 상당히 좋아한다. 그러나 배우 임창정의 색깔은 그대로였다. 변신이 없었다. 이번에도 '배우'로서의 가능성만 확인된 작품이었다. 다소 진부한 시나리오도 사실이지만 나는 나름 의미있게 감상했다. 진부함이 주는 뻔한 감정이 때로는 사연있는 '흘러간 노래'처럼 애달플 때도 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없음)






 창수와 어머니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창수는 징역대행업자다.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일명 '빵'에 대신 살아주는 것이다. 부모도 모른채 고아로 자란 어린 창수를 식당을 하는 여자가 자식처럼 키워냈다. 영화의 전후 맥락을 상상해보면 그 식당 여자 역시 남편도 자식도 없이 거친 세상을 살아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도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 것일까, 창수에 대한 측은지심때문이었을까. 어느쪽이든 그녀는 창수를 진짜 자식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쪼그라든 손과 얼굴이 될 동안 변두리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홀로된 창수를 먹여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삶 또한 투쟁이었으리라. 오직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왔던 인생. 창수를 거둬들였으나 변변한 교육도 제대로 된 보살핌도 그녀에게는 힘에 부친 일이었을 것이다. 과연 누가 그녀에게 자식교육을 못했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창수도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빵을 전전하면서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동네 건달로 살아갔던 것이다. 사실 이런 부분이 영화 전체 흐름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않으나 인간 '창수'를 이해하고, 영화를 마음으로 읽어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버려진 두 마음이 만나다






창수는 어느날 거리에서 미연(손은서)을 만나게 된다. 어떤 남자에게 버림받듯이 고급 승용차에서 뛰쳐나온 여자였다. 창수는 남자에게 위협 당하는 미연을 도와주려다 마음을 뺏기고 만다. 그리고 창수는 그녀와 소주 한잔을 마신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지만 자신이 사는 동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옷차림과 외모때문에 움직이려는 마음을 접기로 하고 포장마차에서 먼저 나온다. 그러나 술 취한 여자를 낯선 동네에 남겨두고 떠난 것이 마음에 걸려 되돌아 온다. 결국 미연은 만취상태로 발견되고, 그녀를 다시 돕기로 한다.





이때 창수는 여관방이 아니라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창수가 혼자사는 집이라서 여관으로 간 것과 다를바 없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손끝도 대지 않는다. 관객들은 어쨌든 창수 역시 속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란 원래 그런 동물이라고 비웃으면서 말이다. 그래 맞다. 그러나 남자란 그런 동물인데다가 특별히 무서울게 없는 동네 건달인 창수가 그랬다고한들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두번 돌려봤을 때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창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첫 눈에 반한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했을 것이다. 창수의 어머니가 세상 천지 의지할 곳 없는 창수를 거둬들였듯이 말이다. 비록 무식한 그였지만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창수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이미 배운 셈이다. 좋은 집안, 좋은 대학에서도 배우기 힘든 그것을.





 세상을 사는 두가지 방법






여기 두 남자가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다르다. 지성파 보스 김도석(안내상)에게 인생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창수에게는 비겁하게라도 살면서 그저 하루하루 재밌으면 그만인 세상이다. 그러나 미연을 만나고 부터 창수는 자신이 살아갈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늦게나마 창수는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김도석은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창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을 각오로 살아간다. 같은 듯 다른 두 남자의 인생. 누가 정말 비겁한 인생이고 잘못된 인생으로 사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정글과 같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김도석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웠던 '사랑'을 지키려고 사는 창수 같은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그래도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매 순간 김도석이 되고, 창수가 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 어떠한가.





  미연은 창수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했고, 창수는 미연의 작은 배려에 모든 것을 건 남자다. 몰랐는가. 남자는 여자를 눕히려고만 하는 동물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는 여자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창수(愴壽)'라는 영화 제목에는 각기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을 맨 끝에 알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영화를 감상하는데 지장은 없다. 그의 진짜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의 실제 이름은 '창수(彰洙)'다. 의미는 서글프게도 '밝은 강' 정도 될까. 어쩌면 영화 '창수(愴壽)'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왔던 '인간 창수'에게는 잘 어울리는 영화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착한 사람들은 건들지 말자. 약한 사람들도 건들지 말자. 그들에게는 돈, 권력, 명예보다 사랑이 전부다. 그들이 한번 분노하기 시작하면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교훈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때론 진부함이 그 어떤 포장보다 진실되다. 이 뻔한 영화에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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