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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영화/내가 정한 명작

건축학개론, 우리는 매일 아지랑이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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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용주/출연 엄태웅, 한가인, 배수지, 이제훈 외




'명작' 카테고리에 영화 '건축학개론'을 기록합니다. 특별히 마음에 남은 영화가 없어서 오랜 시간 비어있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별점 평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주게 되었고,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을 채워오는 이 한편의 영화에 새벽시간,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잠이 깨신 부모님께서 놀라실까봐 소리도 내지 못한채 휘몰아치는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많이 울어야만 했는지...저의 머리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는 감정의 잔상들 때문이었는지, 현대인이라면 필연적으로 갖고 있다는 고독감과 쓸쓸함때문인지...

 

 



 


    * 모든 이미지의 흑백톤은 필자가 편집했음을 알립니다.



승민(우)은 서연(좌)을 짝사랑합니다. 늘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가 우연히 학교 과제를 같이 하게 되면서 가까운 친구사이가 됩니다. 솔직하고 당당한 서연과 달리 승민은 감정 표현에 서툴고 소극적인 남학생입니다. 좋아하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긴장된 모습으로 그녀를 만납니다. 기분좋은 긴장감입니다. 옆집 누나를 짝사랑하고, 또래의 동네 여학생을 좋아하던 우리들의 모습을 많이 닮아있습니다. 그녀가 꽂아 준 이어폰에서 '전람회의 기억의습작'이 들려올 때, 이미 그것은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명명되지 않은 거대한 행성이 마치 번개가 내려치듯 자신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소리였습니다. 행성은 파편화되어 그의 혈관을 타고 온 몸에 흐르면서 짜릿하고 뜨거운 호흡을 시작합니다. 승민은 이제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5년이 지나고 서연은 고객으로서 건축 디자이너가 된 승민을 찾아갑니다.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 승민은 뜻밖의 재회에 다소 놀랍니다. 고향인 제주도에 집을 짓고 싶다는 서연을 향해 승민은 초등학생이 여자 친구를 놀리듯 빈정거립니다. 여전히 그와 그녀 사이에는 무엇인가 가로 막혀있습니다. 돈 많은 이혼녀와 미혼의 평범한 월급쟁이로 만난 그들은 그런 간격 만큼이나 서로에게 멀리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화가나서 카페를 나가버린 서연은 자동차 키와 휴대폰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게 됩니다. 승민은 그녀에게 돌아와서 차키와 휴대폰을 그녀 손에 건네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15년 전의 인연과 완전하게 다른 재회를 이어갑니다. 시간적인 거리 또는 공간적인 거리에서 비롯된 차이점이 아니었습니다. 확인받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함께 있어서 행복했던 과거와 확인된 사랑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현재가 만들어낸 운명. 과연 15년 전 그들에게 무슨일이 있었던 것이고, 현재 서연과 승민이 짓고 싶은 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5년을 이어주는 순대국




본 포스팅을 시작하기 전에 작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줄거리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리뷰라는 목적을  생각하면 이야기의 흐름이 들어가야 적절한 선택이고, 자유롭게 내 감정을 흘려 내보내면 저만의 감상평이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냥 후자를 선택해서 가는 중입니다.

 

 


 

저의 감정이 폭발한 장면입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이라도 왜 이 장면에서 울음이 나왔는지 이해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바로 전 장면에서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었습니다. 서연이 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 집을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으로 설명하다가 승민의 사진에서 목이 메이던 순간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등장한 모자. 순대국이 차려진 밥상 앞에서 대화를 합니다.



승민 : 왠 순대국이야?

어머니 : 응, 그냥 생각나서 간만에 해봤어. 너 미국가면 그런거 언제 먹어봐.







서연 : 너 밥은 먹었어?

승민 : 응...아니! 아직 안먹었어.

서연 : 너 순대국 좋아해?

승민 : 어?

(장면전환)

서연 : 무슨 남자애가 순대국도 못먹어. 서울 촌놈.

승민 : 아니 못먹는게 아니라 별로 안좋아하니까 그렇지.



15년 전에 승민은 어머니 가게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우연히 서연을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승민의 어머니는 승민이 어릴때부터 시장에서 홀로 순대국집을 꾸려가며 자식을 키웠습니다. 어쩌면 저의 가슴이 순대국을 과거와 현재의 심정적인 교차점으로 받아들이며, 두 사람의 미래를 이미 가슴에 그려놓고 있었나 봅니다. 


15년 전, 순대국 앞에서 초라하고 억센 어머니의 모습을 서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승민. 저의 순대국에도 그의 순대국에도  당당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했던 자화상이 담겨있었습니다. 15년이 지난 후 노쇄한 어머니는 미국행을 앞둔 자식에게 다시 순대국을 꺼내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미국가면 그런거 언제 먹어봐'. 승민은 순대국 앞에서 15년 전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때처럼  구부러진 것은 구부러진채로 그냥 두기로 합니다. 승민의 마음에서 자라나던 아지랑이 꽃은 오래되지 않아 다시 질 것입니다.

 

 



 승민과 어머니의 집짓기



 


 

이 영화는 집짓기와 사랑짓기의 맥락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집을 세울때 기반 다지기가 충실하지 못하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서연이 싹 밀어버리고 새로 집을 지으려고 했지만, 본인이 생각하지도 못한 낯설음을 발견했습니다. 서연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것은 새로운 집이 아니라 익숙함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을 마음에 간직하는 일이었어요. 그러나 승민의 집짓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서연과 승민은 다시 만나 하나의 집을 완성시키려고 하지만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인지, 승민으로선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는지...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등장 횟수에 비해 승민의 어머니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승민은 걱정이 많습니다. 곧 미국으로 들어가서 일도 하고, 결혼도 해야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성장하도록 온갖 고생을 하셨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신경쓰이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엄마에게 하소연하듯이 외칩니다. "엄마도 이제 편안하게 살어. 엄만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 평생 여기 살면서 고생만하고."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는 아들의 바보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어이구, 집이 지겨운 것이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그렇습니다. 집은 그냥 집이고, 사랑은 그냥 사랑입니다.





 첫사랑, 아지랑이 꽃이 지기 전에



 

영화를 보고 바로 글을 쓰려했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못해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을 소비해도 여운은 금방 사라지지 않더군요. 리뷰를 쓰기위해 영상을 계속 돌려보는 동안에도 가슴이 자주 먹먹해집니다.


 



리뷰를 위해 두번째로 이 영화를 보면서 허준호 감독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건축학개론>은 우리 모두의 공감을 충분히 살 만큼 첫사랑의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을 그렸지만 사실 매우 잔인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평소 저는 <봄날은 간다>와 <행복>의 감독인 허준호의 영화에 대해 '일상을 매우 잔인하게 표현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축학개론>은 그것에서 조금더 나아갔습니다.

 

허감독이 스토리를 통해 '극단적인 절망감'을 표현했다면, 이용주의 <건축학개론>은 갈등을 내면화시켜서 인물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고립시켜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이용주 감독은 갈등을 전체적으로 분산하지 않고, 오히려 최고점을 후반부와 결말 부분에 집중시키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침대에 엎드려 '두 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15년 전에 그냥 고백했다면 좋았을텐데'를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 중 한명인 김동률의 중저음이 어둠속에서 저를, 버틸 수 없을 만큼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

 

 

"<건축학개론>은 관객에게 조차 탈출구를 개방하지 않은 나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 '불신지옥'을 만들었던 이용주 감독 작품입니다. 그가 감독으로서 총 두 편을 만들었는데, 모두 '명작' 카테고리에 포함된 것을 보니 그와 저의 정서적 코드가 비교적 잘 맞는가 봅니다. 그의 두번째 공포영화를 기대했었는데,  '멜로'를 찍을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작이 공포영화였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이정도의 감성을 뽑아낸 것이 저를 무척이나 흥분하게 만듭니다. 과연 그의 재능은 어디까지일까. 이용주 감독님에게 알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또한명의 팬을 얻으셨습니다. 세번째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덧붙임.

핵심적인 내용은 리뷰에 쓰지 않는다는 저의 원칙이 있어서 잠깐 고민을 했지만....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내용이 아니므로 그냥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영화에는 숨겨진 반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승민은 서연을 짝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짝사랑을 시작한 것은 처음부터 서연이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수많은 기회를 철없던 우리들처럼 강물에 흘려보낸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저의 마음이 더 저리고 아팠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 모든 서연과 승민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작고 허름해도 집은 그냥 집이라고. 그러니 지금 당장 용기를 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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