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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영화

다른 나라에서, 홍상수표 뜨거운 숭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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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홍상수/출연 이자벨 위페르, 유준상, 정유미, 문성근, 윤여정, 김용옥 외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몇 일전 '다른 나라에서'를 그의 네번째 영화로 보았으며, 그 다음으로 감상할 그의 또 다른 영화도 합법적인 유료 다운로드로 준비해놨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영화를 별로하고 생각하는데 왜 자꾸 보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첫번째! 홍상수 감독은 유명하니까! (or 하다고 하니까!)


두번째! ....음..........그러니까........뭣이냐 하면.....................이런 제길슨!!!







 홍상수의, 홍상수에 의한, 홍상수를 위한 영화?







감독 이야기 먼저 해야겠다. 심심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홍상수 영화를 보면 안된다. 대다수 사람들도 나처럼 그의 영화를 '재미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라고? 리뷰 평점을 보면 'Good' 부분에 사람이 더 많다고? 뭐...전국 누적 관객수가 4만명 되지 않은 영화에서는 가능한 점수다. 어차피 매니아만 챙겨보고, 그들만 주로 평가를 내리기 때문이다. 아니면 뭔가 있어보이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 평론가들도 대체로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마치 '우린 너희 평민들과는 달라'하고 말하는 듯하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숨겨진 메세지 찾기' 게임을 만난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긴다. 이제 기억도 잘 안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오! 수정,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홍상수 영화를 재미없어 할까?에 대한 답이다.


한편에선 그를 '작가주의적 감독'이라고 말을 하지만 난 그딴거는 잘 모르겠고,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가 '일상은 무한한 금광이다'라는 말을 한 것처럼 홍상수는 평범함을 사랑하고, 그의 영화는 그런 평면적 일상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내가 그의 영화를 좋게 평가하는 부분이 딱 저거 하나다. 그래서 멜로와 코믹, 스릴러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그의 작품에서 숭늉처럼 맹숭한 맛을 느낀다. 그의 영화를 멋지게 포장해서 이해하려고 하지마라. 그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남은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그의 영화는 소중하다. 소중한 것이 꼭 재밌어야 하는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 아주 재미없는 편도 아니다.) 그러나 마치 홍상수가 대단한 예술영화 감독인 것처럼 호들갑 떠는 평론가들은 솔직히 조금 밥맛이다. 왜 당신들은 홍상수처럼 담백하게 평론하지 못하는가.








 3가지 이야기와 같은 사람들






이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다.(헷갈리지?) 엄마와 딸이 빚쟁이들에게 도망가서 모항의 어느 한 팬션에 숨어있다. 딸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이 영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라는 영화다. 첫번째 시나리오는 안느(이자벨)가 유명한 프랑스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그곳에서 한 부부와 펜션으로 여행을 와서 몇가지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두번째는 한국 영화감독을 사랑하는 불륜녀로(이자벨) 나온다. 세번째는 남편이 한국여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 당한 여자로(이자벨) 나온다. 이 3가지 이야기에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배우가 조금씩 다른 역할로 등장해서 작은 갈등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3가지 이야기는 묘하게 얽혀있다.





각각의 줄거리가 궁금할 수 있겠다. 그런데 줄거리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단조롭고 '극단적으로 일상적인' 모습이 잠깐 나오는 수준이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텐데...지금으로선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몇 번의 장면 전환과 인물간의 사소한 말싸움을 줄거리라고 하면 내 글이 너무 성의없다고 오해하지 않겠나.

 

 

 



 3명의 안느와 한 명의 안느



 

3가지 이야기를 모두 관통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대사다. 위 이미지에 있는 것처럼 '할수 없는 것도 해야 할 것은 꼭 해야한다. 우린 책임져야 한다', , '다 같이 좋아야 좋은거죠.'라는 말도 그렇고, 팬션 주인이 영어 공부를 하면서 중얼거린 '나는 길을 잃었다.', '그 곳은 얼마나 먼가요?' '더 천천히 말해주세요.', '거기 데려다 줄수 있나요?' 등의 대사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안느에게서 공통적으로 풍기는 향기를 닮았다.





  또하나, 외국 여자인 안느는 언제나 '등대'를 찾는다. 그곳에 가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혼자 찾아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전부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여기서 하나 물어보자. 그녀의 언어가 문제일까? 등대에 관심없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우리가 불통과 무관심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꿈보다 해몽'일까? 어쨌든 안느는 한번도 등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한계인지 세상의 한계인지는 불분명하다.


  스님과의 대화 장면은 조금 재밌다. 안느가 스님에게 심각하지만 다소 황당한 질문 몇가지를 한다. 스님은 종교인으로서 할수 있는 답변을 내놓을 뿐이다. 그때 말장난을 하냐고 반문하는 안느의 모습과 비싼 만년필에 커다란 만족감을 표현하는 구도자의 모습이 부지불식간 충돌하여 큰 소리를 내더라. 마주보며 앉아있는 인물들 주변으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 앉았다.





모든 안느는 안정감이 없다. 몸도 마음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느가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잠시 생각하다가 빠져나가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녀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낮선 이국에서 방황하는 여자를 보는 모습이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설렘과 긴장으로 길을 나선 그녀 앞에 삼거리가 등장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어쩌면 홍감독이 의도했던 일이었으리라.





 홍상수가 끓여내 온 숭늉



 



그가 우리 앞에 내놓은 '다른 나라에서'는 '숭늉'같은 영화다. 이도저도 아닌 맛같지만 입안에서 감칠맛이 돈다. 숭늉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밥알 하나하나가 쇠솥 바닥에 저항하듯이 눌어붙어 있는 것을 분리시킨다. 마치 알, 유충 그리고 번데기에서 나비가 탄생하는 것 같이 쌀에서 누룽지로 완전변태를 한다. 이제 누룽지를 조각내어 냄비에 넣고 말간 물을 부어 누룽지가 충분히 잠기도록 한 후 10분~15분 정도를 팔팔 끓이면 말간 물은 다시 때깔좋은 쌀빛 '숭늉'으로 변신한다.


나는 그의 영화를 '극단적인 일상'이라고 했다. 미안하다. 쉽게 말하자. 그의 영화는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니까 재미 없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조금은 창피하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게하는 영화를 좋아할리 없다. 그러나 숭늉의 구수한 감칠맛은 뜨거움이 필요한 것이다. 홍상수는 우리를 뜨겁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그 뜨거움을 당당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구수한 숭늉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사람들이여, 용기를 갖고 인간 홍상수표 숭늉을 마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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